내병은 내가 고친다 

녹즙으로 되찾은 생명

            이 춘 자 / 전남 목포시 산정동

1990년 12월 18일은 대통령 선거 날이었다. 공설운동장에 가서 투표를 해야 되기 때문에 투표를 하러 가는데 어찌나 숨이 가쁜지 걸음을 걸을 수가 없었다. 우리 집에서 걸어서 10분도 안되는 거리를 무려 일고여덟 번을 쉬면서 걸어야 하였다.

"내가 왜 이럴까? 심장이 나빠졌나? 왜 이렇게 기운이 없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몸이 이상했지만 아마 심장이 좀 좋지 않나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잠을 자고 나면 괜찮겠지 하고 청심환을 사다 먹고는 잠을 청했지만 숨은 점점 가빠져 왔다.

저녁을 먹었다. 양치질을 하기 위해 거울을 쳐다보았더니 꽃게를 먹을 때 상처가 났던지 혓바닥이 온통 퍼렇게 멍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혈이 시작되는 데 얼마나 많이 쏟아지는지 감당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19일날 밤 극도로 신경을 쓸 일이 생겨났다. 집안 문제였다. 나에겐 큰 타격을 주는 문제라 성질을 있는 대로 내며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오기 시작하였다. 나는 견딜 수 없는 아픔에 거의 미친 사람처럼 날뛰었다. 머리를 차게 하면 두통이 사라진다는 말을 듣고 추운 겨울인데도 수건을 찬물에 적셔 머리에 동여매고 밖에 나가 동동 뛰었다. 얼마나 뛰었을까? 온몸에 기운이 모조리 빠져나가기 시작하면서 나는 쓰러지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 깨어났을 땐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올케가 옆에서 근심스런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나는 올케에게 병원으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였다. 올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허둥대다가 큰언니 집으로 가야겠다고 일단 결정을 내리고는 나를 차에 태웠다.

큰언니 집을 갔다가 나는 곧바로 강남 성모병원으로 급송되어 응급실에 들어가서 피검사부터 받았다. 건강한 사람의 백혈구 수는 6000-10000인데 나의 백혈구는 1000이며, 건강인의 혈소판은 15만개- 30만개인데 나의 혈소판은 15000개였다. 헤모글로빈도 정상수치인 12-15에 훨씬 모자라는 5.6에 지나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나에게 조금도 움직이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혈소판은 혈액을 응고시키는 성분인데 그 수가 너무 적어서 핏줄이 저절로 터질 수도 있으며 한번 핏줄이 터지면 지혈이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뇌혈관이 터지지 않은 것이라고 하였다. 뇌혈관이 터지면 그 자리에서 죽는데 온몸에 혈관이 터졌는데 머리만 안 터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상태대로 두었다가는 혈관이 터질 우려가 많으므로 속히 피를 공급해야 하니까 피를 줄 사람을 구하라고 하였다. 당장에 어디 가서 나와 같은 O형의 피를 구한단 말인가? 같은 형제의 피는 별로 좋지 않다고 하였지만 급한 대로 남동생의 피를 급히 채혈하여 수혈을 하고 났더니 머리의 통증이 씻은 듯이 나았다. 머리에 피가 부족하여 그렇게도 통증이 심했던 것이다.

그러고난 후 곧바로 골수 검사로 들어갔다. 골반 근처의 뼈를 드릴 같은 것으로 뚫을 땐 기분이 무척 나쁘고 아팠지만 병원에서 하자는 대로 검사를 하였다. 의사 선생님께서 "힘내세요, 용기를 잃지 마세요" 하고 격려해 주셨을 땐 얼마나 고맙던지... 그러나 검사 결과는 나를 아연하게 만들었다. 영화에서나 보았던 병, 소설에서나 읽었던 병, 백혈병, 급성 골수성 M3형 백혈병이었다. "스잔나"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이 머리가 아파 몸부림치다 죽어가던 모습이 뇌리에 선명한데 내가 그와 같은 병이라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래 이제는 나의 생을 정리해야겠구나, 때가 되었단 말이지 하고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내 자신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머리에는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머리 속엔 이제 나에게는 하나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이 가득했다. 그러면서 내가 가야 할 곳은 오직 기도원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도원에 갈래, 기도원에 갈래, 나 기도원에 갈래...."

거의 무의식적으로 되뇌고 있는 나에게 형제들은 나를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한 번 치료해 봅시다, 치료해 보고 난 후에 기도원에 가도 늦지 않으니까, 제발 한번만 치료해 봅시다."하고 사정하였다. 그러나 나는 계속 "아니야, 나는 기도원에 가야만 해!" 하고 고집을 부렸다. 동생들과 언니들은 나를 붙들고 애원을 하였다. 한 번만 치료해 보자고... 어떻게 간곡하게 말하던지 나는 마침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승낙을 하였다. 그래 한번 해보자,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것이라면, 저렇게 애원을 하는데 못 들어 줄 게 무어람 하면서. 나의 승낙이 떨어지자 강남성모병원에서는 혈액 전문치료 병원인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나를 이송하였다.

성모병원 13층은 모두 혈액병으로 입원한 사람들이었다. 주로 백혈병이었다. 모두 까까중머리가 되어 있는 그들을 보니 외계인들이 사는 나라에 온 것처럼 이상하게 보였다. 그 큰 병동에는 소아 백혈병, 성인 백혈병, 재생불량성 빈혈 환자 등 모든 혈액병 환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혈액암으로 고통받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아기, 어른, 할머니, 할아버지들까지 어쩌면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암을 앓고 있는 것일까!

병원을 옮긴 12월 31일, 치료를 위해 간병하는 아주머니도 고용을 하였다. 병원에선 항암치료가 시작되면 혈액이 다량으로 필요하니 많은 사람을 확보해서 피검사를 해놓으라고 하였다. 건강한 피라야 내가 맞을 수 있다면서. 큰언니의 시동생이 다니는 교회의 청년들이 모두 동원되었고 남동생의 친구들 또 내가 아는 집사 님의 아들과 그 친구들까지 모두 동원하여 피검사를 하였다. 3일 동안 여러 가지 검사를 거친 후 1월 3일부터 암치료가 시작되었다. 항암제는 굵은 정맥을 뚫고 그곳에 약을 주입하는데 맞는다기보다는 쏟아 붓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한 병을 가져오면 30분이면 수돗물을 틀어놓은 것처럼 핏줄로 줄줄줄 다 들어가고 말았다. 주사를 맞을 때는 별 생각 없이 맞았는데 주사를 맞고 나니 독방으로 옮겨져 아무도 만나볼 수 없는 면회사절 환자가 되고 말았다. 항암제를 다 맞고 나면 몸의 모든 기능이 떨어지고 면역력이 저하되어 다른 사람들로부터 세균이 감염되면 내가 이겨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주사를 맞고 나자 그때부터 쉴 새 없는 구토증이 일어났고 입술은 돼지 주둥이처럼 부풀어오르기 시작하였다. 온몸은 항암제의 부작용으로 화상을 입은 것처럼 붉게 부풀어올랐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나는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하소연하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렇게 고통을 받을 바에얀 차라리 죽고 싶어요, 나를 죽여주세요!" 하고 떼를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날 밤에 꿈에 나타나셔서 나의 머리에 안수해 주시며 진실한 목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꿈을 깨고 난 후에 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감사하다는 기도였으며 순종하겠다는 기도였다. 항암제의 후유증은 너무나 끔찍스런 것이었다. 뼈의 관절이 잘 펴지지 않았고 폐에는 약도 없다는 곰팡이성 폐렴이 생겨 날마다 엑스레이를 찍으러 방사선과에 가야 했다. 열은 너무 올라 체온계 끝까지 치솟았다가 해열제를 투여하면 확 떨어져 정상으로 돌아오는 널뛰기를 반복하였다. 이를 보고 회진하러 오신 의사 선생님은 금강산 일만이천봉이로구먼 하셨다.

열이 오르면 가슴에서부터 머리까지만 헐떡거리고 나머지는 파랗게 거의 죽어있는 상태가 십여 일이 계속되었다. 이런 저런 후유증으로 무척 괴로웠지만 제일 슬프고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탈모였다. 머리의 피부가 조금씩 아프더니 머리카락이 우수수 빠져 버리는 것이었다. 이발사가 와서 듬성듬성 남아있는 머리카락을 다 밀어버릴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 면회하고 싶다고 하여도 부끄러워서 모두 거절해 버렸다. 무어라고 그때의 심정을 표현해야 옳을까. 어딘가 훌쩍 도망치고 싶고 쥐구멍이 있으면 들어가 버리고 싶고 이대로 사라져 버리고 싶었던 그때의 그 심경은 한마디로 괴로움 그 자체였다.

어느날 심장 검사를 하고 올 때였다. 어떤 남자 분들이 여러 명 서 있다가 "춘자씨 아닙니까?"하고 물어 왔다. 머리를 들고 쳐다보니 교회 모임의 동료들이 면회를 온 것이었다. 난 너무 창피해서 말을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남자 분들도 모두들 나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훔치는 것이었다. 병실에 돌아와서 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아마 지구가 멸망해도 그렇게 울지는 않았으리라. 머리카락이 뿌리까지 빠져버려 유난히도 하얗던 두상과 화상을 입은 환자처럼 부풀어올라 더러워진 살갗을 보며 "내 몰골이 이게 뭐야, 내가 왜 이렇게 되었어!" 하고 중얼거리며 울고 또 울었다. 눈물은 쉴새없이 흘렀고 그렇지 않아도 부어 있던 얼굴이 더욱더 부어 올랐다. 내가 백혈병환자라는 사실에 몸과 마음으로 적응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요구되었다. 스님들이 텔레비전에 나오면 "우리 동료들이 나왔네!" 하고 웃기까지 하는 환자들을 보면서 그들이 겪어 나왔던 고통의 세월을 읽을 수 있었다.

하루는 내 앞에 있는 병상에 어떤 여자 분이 입원하였다. 병원 측에서는 정오까지 수혈을 해야 하니까 수혈해줄 사람을 구해 놓으라고 하였다. 환자의 남편 되는 분이 환자와 같은 혈액형을 가진 사람을 구하려 사방을 수소문하였다. 그러나 갑작스런 일이라 오후 2시가 되어도 사람을 구하지 못하여 수혈을 하지 못하자 갑자기 환자는 "아이구, 머리야! 아이구, 머리야!" 하면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순식간에 의식불명이 되어버렸다. 옆에서 간호하고 있던 여동생이 "언니, 어떻게 해!" 하고 울면서 간호사에게 뛰어가 연락을 하였고 연락을 받은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들이 쫓아와 중환자 실로 이송해 갔는데 그 후로 그 환자는 깨어나지 못하고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혈소판이 부족하여 뇌에서 혈관이 터져 버린 것이었다.

어떤 환자는 항암제를 맞다가 죽기도 하였다. "어? 주사약이 들어가질 않네요?" 하면서 환자를 보면 환자는 이미 숨을 거두고 만 후였다.

어떤 아주머니는 피를 쏟고 쏟다가 결국에는 혼수상태가 되어 중환자 실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들어온 사람들이 하나 둘씩 죽어 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미 나도 죽음을 초월하고 담담히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병을 얻은 것이었다.

항암제를 다 맞고 난 후 나는 한 달을 죽음과 싸우며 사선을 넘나들었다. 배는 너무 아파 오고 설사는 끊이지 않았으며 웬 구토는 그렇게 심하게 나오는지 한 달에 만오천 원이나 하는 알약을 사다 먹고야 구토가 가라앉았다. 화장실 가다가도 몇 번이나 쓰러졌다. 그때마다 간병사 아주머니는 "우리 환자 큰일 났어요!" 라고 소리치며 간호사에게 뛰어갔었고 그러면 간호사들이 뛰어와서 부축하여 침대에 뉘어주곤 하였다. 잠은 왜 또 그렇게 들지 못했던지 밤새 뒤척이다가 간호사에게 잠좀 잘 수 있게 해달하고 사정하여 약을 타 가지고 와서 먹고야 겨우 한숨 자기도 하였다.

한 달쯤 지나니 몸이 조금 회복이 되어 퇴원하였으나 두 달 후에는 또 입원하여 항암제를 맞으라고 하였다. 이런 식으로 1차, 2차, 3차, 4차까지 하여야 치료가 완료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1차 치료를 정신없이 넘기고 2차 치료를 받게 되었다. 2차 치료가 그런 대로 수월하게 넘어간다고 할 때였다. 다리에 주사를 맞고는 화장실에 가려고 발을 내딛는 순간 마치 다리를 바늘로 찌르는 둣한 통증이 일어나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는 주저앉아 버렸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퇴원하여 몸을 추스리고 있는데 주사 맞은 자리가 부풀어올라 걸음마저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통증은 또 얼마나 큰지 급기야 119 구급차를 불러 타고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실려가게 되었다. 응급실에 가서 보니 누울 침대도 없었다. 땅바닥에 타월을 깔고 있으면서 통증을 호소했으나 의사의 손길이 부족하여 아침에 갔는데 오후 늦게서야 외래에 가서 진료 신청을 하고 의사선생님께 문의해 보라는 지시를 해주는 것이었다. 외래 진찰을 받고 나는 곧바로 다시 입원을 하여 다리의 치료를 받게 되었다. 입원해 있던 보름 동안 나는 곰팡이성 폐렴 때문에 혈담까지 쏟게 되었다. 항암제의 부작용은 맞아 본 사람이나 알지 그 누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런 상태를 정말로 알 수가 있겠는가!

치료 후에 퇴원하여 집으로 왔으나 마냥 쇠진하여 누워만 있었다. 그렇게 두 달쯤 지내다가 3차 치료를 받기 위하여 다시 입원하게 되었다. 이때의 주사는 얼마나 아픈지 혈관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3차 치료 때도 열이 몹시 올라 수은주가 체온계 끝까지 오르락내리락 하였다. 이마에는 얼음주머니를 올려놓고 사시나무 떨 듯이 덜덜덜 떨고 있었다. 고열로 인해서 거의 사경을 헤맸기 때문에 나의 생각에 더 이상 항암제를 맞다가는 오히려 일찍 죽어버릴 것 같았다. 두려움이 엄습하였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다, 항암제 맞고 고통받다가 이 세상을 하직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고통을 받지 않고 죽는 것이 더 낫겠다. 나는 4차 치료를 포기하고 말았다.

의사 선생님은 병원에서 지나다 만나면 왜 4차 치료를 받지 않느냐고 나무라셨지만 난 못들은 척 해버리고 고통을 받지 않는 편을 택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간병하시는 아주머니를 집에 데려와서는 나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약들을 먹기 시작하였다. 병은 한가지인데 약은 200 가지라더니 민간요법엔 약들이 많기도 참 많았다. 민들레를 뿌리까지 캐서 즙을 짜먹기도 하고 다슬기를 먹거나 돌미나리를 100번 이상 씻어 즙을 짜서 먹기도 하였다. 그리고 소뼈를 고아서 먹기도 하고 호박에다가 감초, 꿀, 민물 뱀장어를 넣고 푹 고아 그 물을 먹기도 하였다. 운지, 영지, 상황 버섯도 다려서 먹고 한약재를 소개받으면 서울 경동시장에 가서 사서 다려 먹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일어날 기운이 없어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여동생이 자라 큰 것 일곱 마리에다가 민물 뱀장어 20 킬로그램에 마늘 한 되, 대추 한 되, 생강 약간을 넣어서 건강원에 가서 고아왔다. 그리고 돌미나리는 백혈구가 많이 생긴다 하여 계속하여 녹즙기로 짜서 그 즙을 먹었다. 예전에 있던 녹즙기로 짜려니 너무나 더디고 잘 짜지지 않아 동생에게 녹즙기를 새로 사야겠다고 말했더니 큰언니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 녹즙기가 춘자에게는 생명을 이어주는 귀중한 물건이니 빨리 사주어야 한다고. 남동생과 같이 나가 여기저기 돌아보고 제일 맘에 드는 녹즙기를 사들였다. 그 무렵 녹즙기에서 중금속이 나온다고 언론에 대서특필되던 시절이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녹즙을 먹는 것을 포기하였던 때였다. 가정에서 녹즙기는 애물단지가 되고 녹즙기 회사들은 망해 가던 그런 시절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녹즙기 회사도 이 무렵 망해 버렸다.

텔레비전에서 나는 어느 불치병 환자가 나와서 "녹즙기가 해롭다고 하나 나는 그래도 녹즙을 먹고 나의 병을 고쳤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정말 그렇다. 죽을병에 걸려 있는 나에겐 중금속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느냐 죽느냐 갈림길에 서 있는 환자들에게는 중금속 타령은 사치인 것처럼 들렸다. 날마다 시장에 나가 비싸건 싸건 무조건 돈을 달라는 대로 주고 돌미나리를 사서 짜 먹었으며 자라와 민물장어 탕을 날마다 하루 세 번씩 먹었다. 미나리 즙을 부지런히 짜서 먹었다. 풋내가 난다든지 맛이 이상하다든지 하는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초봄에는 미나리가 얼마나 비싼지 2-3만 원어치는 사야 겨우 몇 컵이라도 짜먹을 수 있었다. 다슬기도 피가 많이 생기고 간에도 좋다 하여 시장에 나가면 미나리에다 다슬기까지 사 가지고 와서 된장을 풀고 푹푹 삶아 국물은 국물대로 먹고 알맹이는 알맹이대로 일일이 가위 뒤로 꼬리를 따 가지고 알맹이를 빼먹었다.

병원에 정기적으로 진찰을 하러 가보면 같이 입원했던 사람들은 하나씩 둘씩 보이지 않았다. 모두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만 것이었다. 귀부인처럼 생겼던 방씨 아줌마, 탤런트보다 더 예뻤던 김양, 부잣집 맏며느리처럼 생기셨던 오씨 아줌마, 남편이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될 때까지만 살아다오 라고 날마다 부탁하던 권씨 아줌마, 제주에서 왔던 이쁜이 학생.... 갈 때마다 안 보이는 그들을 생각하며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겠지 하고 생각했었다.

제주도에서 왔던 아줌마는 남편이 죽어 장례식을 치르고 곧 백혈병에 걸려 입원하였는데 불행히도 아들 둘을 남겨놓고 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말을 들었다. 철없이 아픈 엄마의 발치에서 노래를 들으며 발을 흔들어대던 아들의 모습이 떠오르며 이제 어찌 살아나갈 것인가 하고 걱정이 되었다. 다들 이렇게 죽어갔었다. 그러나 나는 이상스럽게 날이 갈수록 몸에 생기가 돌았다. 나는 기운이 나서 교회에도 가고 기도원에도 가고 친척집에도 갈 수 있을 만큼 건강이 좋아졌다.

나의 여동생은 쑥을 뜯어다가 말려서 미숫가루를 만들어 먹어보라며 보내 주었다. 쑥도 피를 만들고 위를 치료하고 장을 치료하는 데 특효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중에는 손수 쑥을 뜯어다가 그 즙을 짜 먹을 때는 얼마나 쓰던지... 그래도 그게 약이 된다 하니 무엇이든지 먹어대는 것이었다. 피검사하여 헤모글로빈 수치가 떨어지면 얼른 쑥을 뜯어다가 그 즙을 먹었다. 그러면 헤모글로빈 수치가 올라갔다. 백혈구 수치가 떨어지면 미나리 즙을 더욱더 많이 먹었고 피곤하면 자라탕을 먹었다. 그러면 백혈구 수치도 올라가고 피곤이 싹 가시는 것이었다.

당근 안에 들어 있는 베타카로틴이 암을 치유하는 성분이라고 하여 당근도 한 보따리씩 사다가 날마다 얼마나 짜 먹었는지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다.

이렇게 열심히 녹즙을 짜먹고 자라탕, 다슬기를 먹고 있는 동안에 피의 수치는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처음엔 일주일에 한 번 진찰을 받으러 갔으나 몸이 좋아질수록 병원에 가는 일이 줄어들었다. 한달 만에 가다가 삼개월마다 가게 되고 다시 육 개월 만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는 육 개월마다 한 번씩 가는 것으로 고정되었는데 피검사를 하여 재발이 되었는지 안되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피검사 결과 피의 수치가 많이 떨어지면 백혈병의 재발로 보고 다시 골수검사에 들어가야 한다. 검사 결과가 재발로 판정이 날 경우에는 다시 처음 치료할 때처럼 1차부터 4차까지 치료하게 되는데 재발하면 거의 모두가 죽는다고 한다.

3년이 지나면서 이제 죽지 않으려나 보다라고 생각하다가도 아냐 아직은 안심해선 안돼 하고 혼자 중얼거리며 다시 녹즙과 다슬기 자라를 열심히 먹었다.

어느날 병원에 정기 진찰을 받으러 갔더니 환자 아저씨들끼리 얘기를 하고 있었다. 한 아저씨가 단정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백혈병은 결코 오래 살지 못해. 기한이 3년이야. 아무리 발버둥쳐도 소용없어. 어느 의사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어." 라고. 아직 나는 살았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이르구나 하는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의사 선생님은 5년이 되어야 완치라고 본다며 계속 병원에 다니라고 하셨다.

5년이 되던 마지막날, 의사 선생님은 날짜 계산을 열심히 하시더니 "이제 만 5년이 되었군요. 이제는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치료일지에다가 한자로 '완(完)'이라고 큰 글씨로 쓰시더니 나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는 것이었다.

불치병이라는 혈액 암인 백혈병에서 완전히 치료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안수해 주셨고 또한 돌미나리와 당근과 다슬기와 자라, 민물 뱀장어 탕에서 많은 효과를 본 것이었다.

지금은 만 6년 6개월 정도가 되었다. 현재의 나는 누구 못지 않게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정상인들보다도 더욱 기운이 좋고 힘이 넘쳐난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도 간혹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면 미나리 녹즙에다가 당근 즙을 먹고 자라탕을 먹는다. 평소에 건강을 지켜야한다는 것을 절실히 체험했기 때문이다.

 

<<내병은 내가 고친다>>
1. 백혈병
2. 감기
3, 딸국질
4. 만성피로
5. 냉증
6. 컴퓨터와 목 어깨 통증
7. 위궤양 자연 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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